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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의 김수영
뛰어난 예술가일수록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이광수가 그렇고, 정지용‧이상‧서정주가 그러하며, 김수영(金洙暎)또한 그러하다.
김수영의 에피소드 중에 재미난 것으로는 금니에 관한 것이 있다. 선린중학 1년인가 2년 때, 그는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어둠이 자욱이 내릴 때까지 시인적인 열정으로 타다가 그만 전깃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으깨지고 앞니가 몽땅 부러졌다. 그는 노란 금니를 두 번 해넣었다. 한번은 이를 부러뜨린 직후이고 한번은 6‧25 때였다.
북괴남침시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던 그는 거개 문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문동(文同)에 출입했었고, 다른 문인들과 함께 문화공작 대원으로 평안북도 개천(介川)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한두 달 훈련받은 뒤 평양 부근에 배치되었다가 유엔군의 평양 진주시 탈주, 서울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인민군 잔류병으로 오인, 충무로 파출소 앞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길로 그는 인천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는 포로가 포로의 사지를 절단하여 죽이는 아수라장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영어회화의 덕으로 미군 외과병원장의 통역이 되어 화를 면할 수 있었고, 그 덕으로 다시 금니를 튼튼하게 해 넣을 수 있었다. 이른바 미제 금니였다. 화제의 진원은 바로 그 금니였다.
그 자신이 한 산문에서 쓴 바와 같이 그에게는 편집광적인 면이 있어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이야기를 속사포같이 토해냈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면 금니를 빼내어 술상 위에 내려놓고는 열을 올렸다. 그것이 늘 화근이 되었다. 그는 금니를 물잔에 넣어둔다고 생각하면서(틀니는 물속에 넣어두어야 다시 낄 때 부드럽다) 술주전자 속에 넣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그리하여 그와 그의 술친구들은 금니가 든 주전자의 술을 마시기 일쑤였다.
피난시절 부산 초량동에서 김수영과 더불어 잠시 하숙 생활을 같이한 소설가 (김중희)는 수차례 그 변을 당했다.
깡소주를 마신 어느 날 새벽이었다. 목이 타는 듯하여 머리맡에 둔 주전자를 끌어당겨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몇 번을 그렇게 마셨는지 모른다. 물이 더 나오지 않아서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 김수영의 번쩍번쩍한 틀니가 들어있었다.
또 한번은 아침 일찍 직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술집 주인이 그 앞에 나타나 “선생님 선생님” 불러 술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곤 김수영 앞에 신문지에 싼 물건을 내 놓았다. 무엇이냐고 물으며 신문지를 펴보았더니 김수영의 틀니가 토치카처럼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김수영은 미제 금니의 완강함을 종종 미국의 힘,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에 대입하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사랑의 변주곡)에서도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 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라고 적은 적이 있다.
위에서 “인류의 종언”과 “대륙에서의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는” 는 그의 시니컬한 웃음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혹은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에게 고압선처럼 만질 수도, 쳐다볼 수도, 거론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었다. 포로수용소 출신의 이 시인에게 반공은 너무나 두려운 성이었다. 그가 헌병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경찰을 두려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마나 우익 공포에 시달렸던지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도 파출소 앞을 지날 때면 얌전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어령 주재로 현암사에서 [한국문학]이란 계간지를 낼 때였다.
그 계간지는 동인지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계절마다 동인들이 한 번은 모여야 했다. 그날도 이어령*유종호*김수여*김춘수*박경리*이범선 등이 모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범선이 “김수영씨는 그때 어디 있었어요?”하고 6.25 때의 거처를 물었다. 별 뜻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김수영의 얼굴이 갑자기 백지장처럼 탈색되고 두 눈이 화동잔만하게 열렸다. 그때 박경리는 김수영의 건너편에 마주 않았었으므로 그의 눈이 열려져가는 것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볼 수 있었다. 이범선이 김형, 왜 그러냐고 묻고, 이어령이 화제를 돌려 이끌어 갔으므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김수영에게는 이념 문제가 그렇게도 극복하지 어려운 벽이었다.
김수영의 딜레마의 하나는, 현실로서는 그렇게도 어려운 이념이, 머릿속이나 문학 속에서는 용수철과 같은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는 면이다. 6.25 때의 거처를 묻는 한마디에 백지장이 되었던 사람이 1960년경의 한 신문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3.8 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기 가파를 철 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이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가. 그것은 내가 느낀 목욕 솥의 용해보다도 더 조용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용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는 또 1960년 3월 30일 일기에,
제 2 공화국
너는 나의 적이다.
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제의 나는 없어!
나의 적,
나의 음식,
나의 사랑,
나는 이제 일체의 사양을 내던진다.
적이여
그대에게는 내가 먹고 난 깨끗한 뼉다귀나 던져주지,
번쩍번쩍 비치는, 흡사 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뼈다귀를
금방이라도 윗도리를 벗어붙이고 혁명전선에 뛰어들 채비다. 그러나 그 채비는 내면적인 긴장의 산물이며 시적 상상력의 분출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면적으로는 겁에 질린 산양이었고, 내면적으로는 펄펄 끓는 용광로 같은 존재, 그것이 시인 김수영이었다.
위에서 목욕 솥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생각이 나는데, 김수영은 한 해가 다 가도 목욕을 안하기로 유명하였다. 한번은 시인 김종문(金宗文)이 종로 3가에서 어제의 술기를 풀려고 목욕탕을 찾고 있는데, 앞만을 보고 쫓기듯 걸어가는 김수영을 보았다. 뒤쫓아서 팔을 붙들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벌거벗은 몸이 면구스러운지 탕 속으로 숨어들어갔다가 나온 뒤로 때를 미는데, 이것은 때가 아니라 완전히 껍질 벗기기였다. 한 껍질이 아니라 두 껍질, 세 껍질이었다. 얼마를 벗겼던지 뽀오얀 살결이 나오고, 스스로 보기에도 괜찮다 싶었던지 웃으며 탕 속으로 들어왔다. 탕 속 물이 넘쳤다. 순간 김종문이 ‘유리카’ 했다.
“유리카! 때가 벗겨지면 속살이 나오는군.”
“유리카! 속살이 나오면 우리는 못 참지. 못 참으면 생산적이 되지.”
“오오, 더불어 산 자들이여.”
“오오, 고독의 평온이여.”
“오오, 자유! 오오, 휴식.”
“오오, 나의 벗들!”
“유리카, 벗들! 시인들.”
그들은 목욕하는 일도 잊어버리고, 목욕탕 속에서 벌거벗고, 유클라테스의 유리카를 회치며 끝없이 즐거워했다. 그는 신이 나면 폭포수처럼 격정을 토해냈다.
마지막 여행이 되는 부산으로 펜클럽 문학강연에 동행했을 때도, 문학은 이런 것이라고 풀어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시론의 요체가 되는 ‘온몸으로 시쓰기’를 역설했다.
나는 시를 모릅니다. 시를 쓴다는 일이 무엇인지 알면 시를 못 씁니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부숴버려야 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밀고 나갑니까? 그 ‘무엇’은 ‘동시에’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청중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었다. 침을 튀기며 열변을 했었다. 이것이 우리 詩이론에서는 수용 시학이 아닌, 최초의 우리 시학이며, 이후에 ‘창비파’와 ‘문지파’에 다같이 길을 열어주되,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독자적인 이론을 탄생케 하는 순간이었다.
그 강연을 하고 김수영은 힘이 부쳤던지, 강연장에 왔었던 『새로운 시대와 시민들의 합창』 동인 이였으며, 지금은 부산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평론가 양병식과 함께 남포동으로 나갔다. 그들은 소주집으로 들어갔다. 김수영은 K를 부르자고 했다. K 란 서울의전에 다닐 때 양병식 김수영․ 이봉구들과 어울려 예술 활동을 했던, 지금은 양병식의 아내였다. “그럴까” 하고 양병식이 일어나 전화 쪽으로 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안 오겠대. 더 마음이 가라앉은 다음에 만나자더군.”
김수영의 머릿속에는 잠시 확 필름이 지나갔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로, 병원장의 통역을 하며 간호사들과 거즈도 개고 있었을 때였다. 하루는 낯익은 얼굴이 지나갔다. 달려가보았더니 K 였다. 김수영은 반갑고 놀라 아무 생각 없이 K를 불렀다. K 가 돌아보았다. K 의 시선이 그의 가슴에 붙은 포로라 쓰인 영문자에 머물렀다. 그와 동시에 “이 빨갱이 새꺄” 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마도 그 일이 지금 K의 입에서 나온 ‘마음이 가라앉은 뒤’라는 말의 내용이 될 것이다.
김수영은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펜클럽 강연팀과 귀로길에 경주로 가서 “여기까지 왔으니 청마비를 보고 가자”고,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유치환의 시비가 있는 곳으로 일행이 갔을 때도, 김수영은 감정이 격해서 시비에 술을 부으며 울기 시작했다. 예사 울음이 아니었다. 모윤숙과 이헌구가 달래도 듣지 않고 계속 시비를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여인네처럼 울어댔다. 그 모습을 뒤에 안수길은 “그날 그는 이후에 제 운명이 될 사고를 예감이라도 하는 듯했다.”고 적었다.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1968(48)세)
[성] [원효대사] [의자가 많아서 걸린 다] [풀] 등을 씀.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길에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침.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치 못한 채로 다음날 16일 아침 8시 50분에 숨짐.6월 18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름.서울 도봉동에 있는 선영에 묻힘.
덧 도봉산 19번 종점에서 금득사를 끼고 약 20분가량 오르다 보면 오른편으로
김수영 시비가 있습니다. 시비에는 물론 대표작인 (풀)이 새겨져 있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이나 제대로 받는지...
더 많은 이야기는 지면상 이만 줄이고 연보나 생애에 관한 것은 찾아보는 즐거움도 클 것입니다.
(덧글 이 글은 최하림 시인의 문학기행에서 발췌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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