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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끝끝내 탈출하지 못하는 영혼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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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 민 시인
두 사람의 죄수가 탈주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눈보라 치는 밤에 수용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였다. 수용소가 있는 이 골짜기는 주위가 넓은 평지였는데, 부락은 이 평지를 벗어나서 한참을 더 가야 하였다. 얼마동안 정신없이 걷다보니, 부락이 나타날 때가 되었겠다고 짐작이 갔는데, 어슴푸레하게 부락 같은 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모습이 낯익어서 자세히 보니 자신들이 출발하였던 수용소, 바로 그 곳이었다. 놀란 두 죄수는 다시 정신없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얼마를 정신없이 걸었는데도 수용소의 철조망 앞이었다. 세 번째로 필사의 도주를 하였지만,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후부터 이 수용소를 탈주할 생각을 마음에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왜 죄수들은 제 자리만 빙빙 돌면서 탈주하지 못했을까? 눈보라가 치는 밤이나 안개가 낄 때면, 자신은 똑바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원을 그리면서 같은 자리를 맴돈다고 한다. 사람의 걸음걸이가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뜰 때는 눈이 잘못된 걸음을 고쳐주지만 밤에는 자신의 걸음이 직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시편들은 불교에서의 업(業),기독교에서의 원죄의식(原罪意識)이 짙게 깔려 있다. 아니, 어찌 보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죄의식처럼 실제로 범하지 않았거나 범할 가능성이 없는 행위까지도 그는 자신이 범하였다고 상상한다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가 저지른 죄는 법률상의 죄(crime)가 아닌 종교적, 혹은 도덕적인 죄(sin)이다.
그의 시세계가 지닌 느낌을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일지 모르지만, 써보고자 한다.
1. 익명의 섬으로 흔들리기, 혹은 비틀거리면서 걷기
비명을 지른다.
함몰하는 소리,
비명을 삼키는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익명의 섬,
어느 곳에도 빛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완강한 거부다.
눈을 감는다.
-후략-
- ‘섬’ 부분
이문열의 소설 “익명의 섬”이 떠오르는 시이다. 산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여자가 군대에 간 애인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막상 오지 않자 허탈한 마음으로 비를 피하러 창고에 들어가는데, 마을에서 병신 취급을 받는, 못 생긴 거지와 뜻밖의 정사를 하게 된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은 저항을 포기하는 것으로 변하는데, 이 일은 마을 사람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바로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익명성이다. 화자는 익명성만이 존재함으로써 개인이 ‘함몰하는 소리’를 들으며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비명은 거부의 몸짓이다. 그러나 그 비명마저도 삼켜 버리는 익명성의 ‘안개’ 속에서 화자는 절망을 포기하고 만다. 바로 ‘눈을 감는’것이다.
공룡처럼 거대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힘은 돌도끼도 손에 쥐지 못한 원시인처럼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래서 화자는 비틀거린다. 직선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안개 속에서 그는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원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화자가 빙빙 돌면서 걸어간 걸음 자체가 동그란 하나의 섬이고 섬은 바로 개인과 개인이 거리를 두는 익명성의 상징이다. 안개가 자욱한 섬에서는 모든 비명이 다 삼켜지고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섬은 감옥이다.
2. 신 앞에 선, 또는 죄 앞에 선 단독자
낯설은 사내와 마주 앉아
노름채 없는 화투를 친다.
한 번을 쳐도 지고,
두 번을 쳐도 지고,
세 번, 열 번을 쳐도 진다.
-중략-
노름채 없는 화투가 끝이 나고
사내는 일어서며 웃는다.
신의 조악한 표정으로.......
- 후략-
- ‘오수(午睡)’ 부분
정지용 시인의 ‘장수산 1’에서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는 구절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지용 시인이 ‘장수산 1’에서 무념무상의 탈속적 세계를 노래했다면,
열 번을 쳐도 백 번을 쳐도 이길 수 없는 완벽한 상대는 다름 아닌 신이다. 화자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지금 “신 앞에 선 단독자”이다. 그에게 삶 자체, 신(神)이라는 존재는 똑바로 걷고자 하는 자신의 팔을 비트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항상 패하기만 함으로써 신이 더욱 낯설고 조악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니, 그는 죄, 말하자면 신(sin) 앞에서 그를 억누르는 죄의식에 항상 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의 제목인 오수(午睡), 즉 낮잠은 패배만 거듭하는 일상적인 삶이 곤한 낮잠과 같음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화투장처럼 바로 누웠다가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워도 그의 낮잠은 항상 악몽이다. 늘 신과 마주앉아 대결해 보지만, 자리를 털고 ‘조악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것은 신이다.
화자는 망연자실 절망감에 빠져들 법도 하다. 다시는 신과 화투를 치지 않으려고 다짐할 법도 하다. 그러나 다시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여기서 또 상기하게 된다. “제대로 절망한 사람만이 인생을 올곧게 살아갈 수 있다.” 그에게 절망은 긍정을 지향하기 위한 부정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불행을 이겨낸 그의 삶에 대한 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다시 그 '낯선 사내와 화투'를 친다.
3. 비틀린 삶의 아픔
비틀지 말아라.
아프다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누군가가 놓은 덫이다.
-중략-
가려 걷는 걸음이 쉬울 법도 하건만,
아프다 아프다 한 시절을 참아도
풀어지지 않는다.
- ‘비트’ 부분
때로는 우리를 ‘비트는’ 삶이 있다. 등 뒤에서 강하게 팔을 비트는 삶, 그 힘이 불가항력이어서 저항을 포기해야만 하는 삶이 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극도의 아픔에 뼈마디가 이그러지는 삶이 있다. 음악의 박자에 해당하는 ‘비트(bit)’에서 ‘비틀다’를 연상하는 시적 재치가 이 시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이 시에서의 비트를 박자로 본다면 16비트의 강한 리듬이 될 것이다. ‘한 시절을 참아내’면 풀어질 듯 하던 팔 비틀림이 풀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원죄가 그의 팔을 비틀기 때문이다.
팔이 비틀린 채로 바라보는 세상은 또 얼마나 비틀어져 있는가. 팔이 비틀린 나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세상은 온통 비틀린 채로 있으면서도 아픈 표정을 짓지 않는다. 비틀면 사물은 깡통처럼 찌그러진다.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비틀어지면 안 될 사람들이 비틀어지고 비틀어지면 안 될 세상이 비틀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그래서 세상에는 통증 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4. 눈뜨고 보는 하루의 소멸과 절망의 생성
눈을 뜬 아침
거울 앞에서 낯선
얼굴 하나를 마주칩니다.
십 년 후나 이십 년 후쯤
만나보아도 좋을 얼굴이
한 잠씩 자고 나면
기억의 무덤 속으로 달려가고
-후략-
- ‘망’ 부분
여기서의 망은 그물(網)인가. 소망(望)인가 망각(忘)인가, 아니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감시하는 망루인가.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 ‘십 년 후나 이십 년 후쯤/ 만나보아도 좋을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직은 이런 얼굴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로 그 얼굴이다.
‘기억의 무덤’이라는 소멸 속에서 화자는 잊어버린(忘) 희망(望)들을 아쉬워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상실해가면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몹시 ‘낯설고’ 자신이 아닌 듯하지만 이내 그물(網)처럼 덮쳐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는 망루에 서서 자신의 원죄를 감시하는 파수꾼이다. 현실적 자아는 끊임없이 탈주를 꿈꾸고 이상적 자아는 탈주를 막는다. 이 힘겨루기는 누구의 승리로 끝나서는 안 된다. 탈주에 성공해서 마을에 도달하게 되면 포만감에 현실적 자아가 만족해 버릴 것이고 탈주 자체를 포기하면 현실적 자아가 꿈을 영영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탈주를 꿈꾸며 시도하고 밤길에 평야를 배회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탈주 불가능의 감옥,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 그가 눈뜨고 있어야 한다.
5. 큰 눈동자에 담은 별 하나
어제는 없던 별 하나가 뜨고
누구의 생명을 받아 올려
천 년을 살면서도
눈 감지 못하는 별이 되었나.
-후략-
- ‘별’ 부분
그를 보면 떠오르는 글이 법정 스님의 ‘설해목(雪害木)’이다. 겨울철 눈에 의해 꺾이고 상한 나무들. 거센 비바람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소나무들이 겨울이 되면 가지 끝마다 사뿐사뿐 내려앉는 부드러운 눈에 가지가 꺾이고 상한다는 것이다. 시적 기교보다는 시적 진정성에 바탕을 둔 그의 시편들은 설해목과 같이 읽는 이들의 가슴을 꺾이게 하고 또 상하게도 한다. 강풍에 의해 한순간에 꺾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꺾이고 상하는 것이다.
그가 큰 눈으로 세상을 휘휘 둘러보면서 눈망울 끝에 별 몇 개씩을 걸어두고 시를 쓰며 끝내 눈감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거칠고 큰 손, 그 손등이 늘 젖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영원히 탈출할 수 없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두운 밤, 안개 자욱하게 낀 평야를 걸어가는 불안하고 고독한 탈주가 사람들의 마을에 닿아 안도감으로 인해 풀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시인은 고독과 벗을 해야 한다. 그가 인가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배부르게 잠이 들어 그의 눈꺼풀이 만족감에 빠져 감겨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탈주 불가능의 감옥, 그곳을 탈주하려는 영원한 꿈들과 그것을 막는 자아성찰의 땅에서 그의 영혼이 끊임없이 서성거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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